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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5

아따 좋다! 따땃허겄다. 김장하기 전이었으니까 아마 입동 무렵이었을 것이다. 오리털 누비옷을 새로 장만하던 날 엄마는 옷가게 사장의 추임새보다 더 격하게 좋아라 하였다. 거울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고개를 이쪽 저쪽 돌려가며 찬찬히 옷매무새를 살피더니 은은한 색깔이 맘에 든다고도 하고 옷 길이가 길지도 짧지도 않고 적당하다고도 하고 평소와 다르게 수다스러워졌다. 분위기를 파악한 가게 사장은 순식간에 겨울 스웨터까지 엄마의 환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다들 열심히 산다 옷값을 계산할 때 가게 사장은 "일시불이지요?' 라고만 물었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 사람이 엄마로 보이는 할매와 같이 와서 고른 물건의 값을 계산할 때 가격을 말하지 않는 것은 기가막힌 상술인 것 같다. '네'하고 대답하면서 곁눈질로 가격표..

잡감/가족 2024.02.23

새색시

해가 첫 해가 어둠 속에서 새 순처럼 솟아오른다. 청룡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여의주가 아니다. 두려움과 설레임이 묻어나는 새색시 볼연지처럼 수줍게 올라온다. 산정에는 기꺼이 새식구를 맞이하는 이들이 주런이 늘어서 있고 나도 그 틈에 끼어 벅찬 소회를 읊조린다. 그리고 순수함을 간직한 모든 이들의 바램을 올 한 해 상차림에 소담소담 담아내기를 새악시에게 은근히 기원해본다.

산에 오르다 2024.01.01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허공에 두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몸이 조금씩 조금씩 공중으로 떠 오릅니다. 계속해서 손 발을 움직이면 더 높이 올라갑니다. 중력을 거스르는 몸뚱이는 풍선처럼 가볍습니다. 빠르지는 않지만 움직임이 자유롭습니다. 마치 물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동작을 하고 있지만 천천히 공중을 날고 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자주 그러는 것은 아니고 가끔 이렇게 공중에 떠다닙니다. 때로는 사방이 확 트인 산정에서 날기도 하고, 때로는 건물 내 로비 같은 공간에서 날기도 합니다. 공중에 떠 있을 때 한번도 비나 눈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바람이 불거나 미세먼지가 자욱한 날도 기억에 없습니다.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새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춥거나 덥다는 느..

잡감/지금 2023.12.25

희망

희망이란 다가올 앞 날에 좋은 결과가 이루어지기는 기대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단어이다.  루쉰은 1921년에 쓴 그의 소설 '고향'의 말미에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이 문장만 보면 알쏭달쏭하기가 마치 불가의 선문답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곧바로 희망이라는 것을 지상의 길에 비유하여 원래 길이란 없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고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루쉰은 그의 또래 머슴이었던 룬투의 행동을 통해 민초들이 희망을 표현하는 방식을 그리고 있다. 그러면서 룬투나 자신의 희망이 부질없는 것은 아닌가 내가 만들어 낸 우상은 아닌가 회의하지만, 희망을 향한 한 걸음 한 걸음 아무것도 없는 곳에 내딛는 발검음에 대한 믿음을..

잡감/지금 2023.12.24

눈 먼 나귀(瞎驢)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짚어보자. 아니다. 이미 충분히 현격한데 호리는 찾아 무엇한단 말인가? 그래도 짚어보자. 아니다. 분별은 어찌 없앨 수 있을까? 일심이 불생한들 그래도 버릇처럼 퍼질러 자고 날이 밝으면 여전히 구루마를 끌고 있겠지. 그리고 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묻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똥구루마에 매달려 가는 눈 먼 나귀여!

잡감/지금 2023.1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