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지금 44

깐치밥

제대로 시한같은 날! 햇살이 냉기를 덮기엔 아직 이른 시각이다. 사람의 시간을 앞서가는 새들이 마을 골목길에 분주하다.   아침을 깨우는 이 새들이 모이는 곳은 마을 회관 옆 족간이 할매네 감나무다. 골목 담벼락을 벗삼아 자라고 있는 감나무 가지에 새들이 모이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깐치밥 때문이다. 그것도 겁나게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아침이 되면 새들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성찬에 환호하고 그나마 조용하던 시골 골목이 살아 숨쉬게 되었다. 감나무 주인인 족간이 할매는 재작년 겨울에 돌아가셨다. 읍내에서 설비 일을 하는 둘째 아들이 가끔 들르기는 한다는데 작년에도 그랬지만 올 해에도 알뜰히 감을 수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감이 많이 달려 있다. 그렇게 된 사연으로 살아 있는 새들은..

잡감/지금 2024.12.20

가을

절마당으로 이어지는 토톰한 은행잎 깔개를 밟으며 걷습니다. 맑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느릿한 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옮기는 것은 이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더 없는 호사입니다.  그런데 걱정없는 저 자줏빛은 어디에 있을까요? 햇볕 가득한 신원사 절마당에 尋紫愚驢 하나가 들어서고 있습니다. 가을비                                                       전인권가을비 소리도 없이 내리네거리마다엔 은행잎이 노랗게약속은 자꾸만 맴돌고 맴돌다걱정 없는 저 자줏빛이 부러워나는 어디쯤 온 걸까어느새 한 해가 지났나말하고 말하고 말하고그녀는 어디에 있을까그때처럼 비는 내리는데비 비 비

잡감/지금 2024.11.20

비(卑)

비(卑)라는 글자는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대체로 신분이 낮은 경우를 이를 때 쓰입니다. 갑골문에서 유추해 보면 밭 전(田)자와 또 우(又)자가 결합된 형태의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한자로드(路)에 따르면  이 글자는 큰 부채를 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주인을 모시는 시종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낮다' '천하다'라는 신분의 위치를 나타내는 글자가 지금은 뜻이 더하여져 '비루(鄙陋)하다' ' 저속(低俗)하다' '천(賤)하다' '왜소(矮小)하다' '쇠(衰)하다' 등의 의미로도 쓰입니다. 요즘 주목받는 인물 몇 명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전에 별을 달고 있었던 이도 있고, 지금 이마에 번쩍이는 별을 달고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큰 부채를 들고 모시는 이가 끝까..

잡감/지금 2024.06.24

다시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은 늘 두렵다. 하지만 어찌보면 그 두려움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무명(無明)이 새로운 시작의 동력일지도 모른다. 삶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시도하는 새로운 시작은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크기나 무게감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도전이고 삶의 에너지다. 당분간 앞으로만 가야겠다.  마치 회로의 다이오드처럼, 수도관의 체크밸브처럼 거꾸로 가지 않을 터이다. 아니 거꾸로 간다는 워딩 자체를 나의 사전에서 지워버리겠다. 잘 될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해야겠다. 6월 21일 아침 이 노래를 듣는다. 원곡은 1971년 까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 주연의 '슬픔이 끝날 때'라는 영화의  주제가인 미셸 폴라노프(Michel Polnareff)의 Ca n'arrive qu'aux autres (남들한테..

잡감/지금 2024.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