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감/가족 7

엄마 #7

'어머니! 올 봄에 집 마당에다 양봉을 해봤는데 벌꿀이 제법 채취 되었습니다. 벌꿀 팔아서 번 돈으로 라디오를 한 대 사서 보냅니다.' 70년대 초 넷째 아들네와 같이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둘째 아들이 선물로 라디오를 보내왔다. 트랜지스터 라디오와 함께 동봉한 편지에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넷째 아들은 나의 아버지다. 물론 둘째 아들은 나의 큰아버지다. 큰아버지는 아이들 가르치는 것을 평생 업으로 하셨지만 농사에도 관심이 많으셔서 양다래 양자두 등 과수도 가꾸고, 텃밭도 일구셨다. 게다가 그 해에는 처음으로 양봉을 해보셨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보다 수확이 좋았나 보다. 그래서 그 기쁨을 제일 먼저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은 아닐까? 그런 연유로 생긴 라디오를 통해 새로운..

잡감/가족 2024.12.03

엄마 #6

Democracy의 어원이 민(Demos)과 통치(Kratos)의 합성어라는 것은 상식이다. 군주나 귀족이 아닌 민(民)에 의한 지배를 나타내는 Democracy라는 단어를 왜국에서는 민주주의라고 번역하였고 우리도 그 번역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갑골문에 민(民)자는 사람의 눈 아래 열십자가 그려진 모양으로 되어있다. 칼로 사람의 눈을 찌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한 쪽 눈만으로도 노동이 가능하기에 다른 한 쪽은 의도적으로 멀게하였다 한다. 한 쪽 눈을 멀게 하여 저항하거나 도망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런 유래로 보자면 民은 확실히 피지배자를 이르는 글자이다. 그 천한 신분의 눈 먼 백성(民)이 지배자이고 주인인 것이 Democracy(民主主義)이다. 엄마가 눈이 아프다고 한다...

잡감/가족 2024.08.11

엄마 #5

아따 좋다! 따땃허겄다. 김장하기 전이었으니까 아마 입동 무렵이었을 것이다. 오리털 누비옷을 새로 장만하던 날 엄마는 옷가게 사장의 추임새보다 더 격하게 좋아라 하였다. 거울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고개를 이쪽 저쪽 돌려가며 찬찬히 옷매무새를 살피더니 은은한 색깔이 맘에 든다고도 하고 옷 길이가 길지도 짧지도 않고 적당하다고도 하고 평소와 다르게 수다스러워졌다. 분위기를 파악한 가게 사장은 순식간에 겨울 스웨터까지 엄마의 환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하였다. 다들 열심히 산다 옷값을 계산할 때 가게 사장은 "일시불이지요?' 라고만 물었다. 아들로 보이는 남자 사람이 엄마로 보이는 할매와 같이 와서 고른 물건의 값을 계산할 때 가격을 말하지 않는 것은 기가막힌 상술인 것 같다. '네'하고 대답하면서 곁눈질로 가격표..

잡감/가족 2024.02.23

엄마 #4

미수(米壽)는 여든여덟 나이를 일컫는 말입니다. 수명(壽命)이 쌀이라니 끼니때마다 쌀밥을 먹어도 될 만큼 대우를 받을 나이가 되었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머리카락이 모두 흰 쌀밥처럼 하얗게 센 나이라는 뜻일까요? 계룡산 연천봉 정상에 오르면 바위에 새겨진 여러 글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중 유독 눈에 띄는 곳에 방백마각(方百馬角) 구혹화생(口或禾生)이라는 글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석각 앞에는 그 글귀의 내용을 해설하는 안내문이 세워져 있습니다. 안내문의 해설에 따르면 방백(方百)은 4백을 의미하고 마(馬)는 80을, 각(角)은 2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방백은 사방이 백이라 사백이라고 해석하면 이해가 되고, 각은 짐승의 뿔이 2개 이므로 2라는 해설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마(馬)는 오(午)에..

잡감/가족 2023.11.17

엄마 #3

그 해 봄 가뭄이 심했다. 논바닥은 쩌억 쩍 갈라지고 수로엔 물이 말랐다. 비가 오지 않는 날들이 하루 하루 더해질수록 엄마는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엄마 뿐만 아니라 다른 집 어른들도 다 그랬다. 눈치 빠른 애들은 작대기를 들고 논으로 나갔다. 나도 작대기를 들고 어른들 틈에 껴서 못자리 판의 마른 흙덩이를 투덕투덕 잘게 두드리는 일을 도왔다. 그렇게 해서 어설프게나마 모판이 만들어졌지만 그 후로도 한동안 비는 오지 않았다. 엄마도 그렇고 동네 사람들에게도 그만큼 시름이 깊어갔다. 고단한 하루가 질 무렵 어둠은 늘 배고픔과 함께 찾아왔다. 어김없이 그 놈이 찾아오면 엄마는 마당 가생이 벌겋게 녹슨 철판 아궁이에 보리짚으로 불이 지폈다. 배고픈 애들 먹일 것 생각하면 고달픈 하루와 더해지는 시름 ..

잡감/가족 2023.08.29

엄마 #2

정형외과 의사의 표정이 밝지 않다 내가 앉은 쪽으로 화면이 잘 보이도록 모니터를 돌리더니 마우스 포인트를 빙빙 돌려가며 화면 속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킨다. 등뼈가 많이 휘었고 협착이 심하다고 한다. 1번 4번 척추가 주저 앉아서 통증이 전보다 심해질 것이고 허리는 더 구부정해질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치료 방법을 묻자 의사는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의사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엄마는 어려운 설명보다는 그가 말하는 표정에서 자신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읽고 있을 것이다. 나에게 설명을 마친 의사는 엄마를 빤히 쳐다보더니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맛있는거 많이 드시고 약 잘 챙겨드시고 어쩌고 하면서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을 당부를 건낸다. 약국에 들러 처방약을 일주일치 받았다. 별 것이나 되는 양 조제되어 나..

잡감/가족 2023.02.07

엄마 #1

내가 갓김치 파김치 고구마순김치 배추겉절이를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엄마가 이 김치들을 자주 담갔기 때문이다. 김장하기 전에는 검붉은 갓으로 김치를 담았고 봄이 오면 흰머리 가지런하게 파김치를 담았다. 갓김치의 알싸한 맛이나 봄향기와 젓내 머금은 야들야들한 파김치 맛은 어릴적부터 내 입맛을 길들여 왔다. 자식들이 장성한 이후에도 엄마는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절구통에 마늘을 다지고 고구마순 껍질을 까고 파를 다듬고 겉절이를 담아 집으로 돌아가는 자식들 차에 몇 통씩 실어 주었다. 두어 해 전부터 엄마가 김치를 담그지 않는다. 작년에도 그 전 해에도 봄이 왔는데 파김치를 담지 않았고 뙈약볕 뜨거운 계절이 되어도 고구마순 껍질을 벗기지 않았다. 겉절이 담그려고 마늘을 찧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고 붉은 고추..

잡감/가족 2023.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