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영산 오르는 길은 어디서나 뒤돌아서면 금산 방향으로 확 트인 조망터다. 오늘은 날씨가 흐려서 별 생각 없이 산을 오르는데 그래도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비단강 조망은 명불허전이다. 가슴이 뻥 뚤린다. 재작년 여름에는 이른 아침 부지런을 떨며 오른 등로에서 발 아래 구름바다가 펼쳐진 장관을 만나기도 했었다. 그 뒤로 몇 차례 행운을 기대하며 부지런을 떨어 보았으나 아쉽게도 그런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어쨋든 흐린 날씨에도 멋진 조망을 선사하는 자연에 감사할 따름이다.
산 정상까지 가는 데에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거리는 짧지만 등로의 경사가 매우 심하다. 따지고 보면 아름다운 조망은 이 경사가 심한 바위길이 내어주는 선물이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면 파노라마처럼 한 눈에 들어오는 비단골 풍경이 그러하고, 고개를 들면 눈 앞에 서 있는 깍아지른 듯한 절벽과 그 위태로운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이 비단강 하늘 위에 펼쳐 보이는 한 폭의 산수화가 그러하다.
정상이 머지 않은 곳 조망이 확 트인 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발 아래 비단강이 굽이쳐 흐른고 새로 생긴 구름다리가 손에 잡힐 듯 하다. 자지산 들머리 앞쪽에는 비단강과 합류하는 봉황천이 보인다. 금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지천 중에 7백의총 곁을 지나 온 기사천은 제원(濟原)중학교 앞 쪽에서 봉황천으로 흘러 들고 그 봉황천은 자지산 (紫芝山) 들머리에서 비단강으로 합류한다. 강물은 멀리 왼쪽에 보이는 봉황대 아래 개티나루를 지나 봉황천과 만난 뒤 난들을 적시고 자지산(紫芝山)과 부엉이산을 병풍삼아 천내를 뱀처럼 휘돌고 호탄을 향해 도도하게 흘러간다.
눈 앞에 펼쳐진 비단강과 바위산들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아름답지만 이 곳에 오면 절로 임진년 왜적들이 침략했던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 청산하지 못한 어두운 과거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까? 21세기 개명한 시절을 살면서도 아직 왜적들의 시간이 끝난 것 같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그러한 개인적 동기와 상관없이 역사는 이 곳이 왜적과 치른 전쟁의 아픈 상처를 간직한 곳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시간을 430여년 전으로 돌려 보자. 그러니까 1592년이다. 그 해 임진년 5월에 왜군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조일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로 넘어가는 주요 요충지인 이 곳 금산에서는 여러차례 전쟁이 벌어졌다. 6월에 지금의 제원 저곡리 일대에서 벌어진 개티전투를 시작으로 7월의 이치(梨峙)전투, 눈벌(臥隱坪)전투, 8월의 연곤평(延昆坪)전투 횡당촌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물론 권율(權慄)이 지휘한 이치전투처럼 승리한 전투도 있었지만 많은 전투에서 조선군은 패배하였고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다.
개티전투에서 금산군수 권종(權悰)이 전사하였고, 와은평(臥隱坪) 일대에서 왜군과 싸우던 중 의병장 고경명(髙敬命)이 전사하였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조헌(趙憲)과 700의병 그리고 의승(義僧) 영규(靈圭)와 승군들은 연곤평(延昆坪)전투에서 모두 전사하고 만다.
들판에서 혹은 강변에서 싸우다 전사한 군인들의 피는 기사천과 봉황천으로 흘러 들어 하천을 붉게 물들였을 것이다. 하천을 따라 흐르던 붉은 피는 비단강으로 흘러 들어 강물 또한 붉게 물들였을 것이다. 저항이라는 선택을 한 죽은 자들을 위해 국가는 무슨 보상을 해주었을까? 말없는 대다수 백성들은 죽은 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마음의 빚을 졌을까? 도망하여 살아남은 이들은 남은 생을 온전히 살아갔을까? 도도히 흐르는 저 비단강물은 알고 있을려나? 다른 건 몰라도 그 때 왜적에 맞서 싸웠던 의로운 백성들의 붉은 피는 기억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