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마 싯달타가 깨달음을 얻은 장소로 알려진 보드가야(Bodhgaya)의 네란자라강(Nerañjarā, 尼連禪河) 옆 보리수 나무는 마가다국(摩揭陀國, 摩伽陀國, Magadha國)의 수도인 왕사성(王舍城, Rājagṛha) 부근에 있습니다. 코살라국 사위성(舍衛城, Śrāvasti)에 있는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anathapindasyarama)와 함께 불교 최초의 양대가람으로 마가다국 빔비사라(頻毘娑羅, bimbisara)왕이 기증한 죽림정사(竹林精舍, Venuvana-vihara)도 왕사성 근처에 지어진 사원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지혜제일(智慧第一)로 불리는 사리불(舍利弗, śāriputra)과 신통제일(神通第一)로 불리는 목건련 (木健蓮, maudgalyāyana)은 왕사성 인근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곳 왕사성 부근에 영취산(靈鷲山, 耆闍崛山, Gṛdhakūṭa, Gijjhākūṭa)이 있습니다. 이 산에 독수리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올려다 보면 마치 독수리가 날개를 접은 채 쉬고 있는 모양으로 보이기 때문에 독수리산으로 불린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이 한역(漢譯)한 법화경(妙法蓮華經) 서품(序品)은 如是我聞 一時 佛 住 王舍城 耆闍崛山中 與大比丘衆 萬二千人俱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구마라집은 영취산을 기사굴산으로 음역하였네요. 한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 기사굴산에 많은 큰 스님과 함께 계셨다는 말이지요. 이 서품의 내용으로 보아 대승의 주요경전인 법화경이 이 곳 영취산에서 설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절집 법당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는 이 영취산에서 부처님이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렇듯 영취산은 부처님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곳으로 예로부터 불가의 성지로 여겨졌습니다. 서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던 동진(東晉) 법현(法顯)의 불국기(佛國記)나 당(唐)나라 현장(玄奘)법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산이 과거에도 매우 중요한 순례성지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동방으로 전해진 독수리산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건너와 여러 곳에 영취산이라는 산 이름을 남기게 됩니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는 여수의 영취산,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창녕 영취산, 물 맑은 부전계곡을 품고 있는 함양 영취산, 신불산 간월산으로 이어지는 영남알프스 양산 영취산, 그 외 울산에도 영취산이 있습다. 이 중 양산 영취산은 2001년 1월 양산시 지명위원회에서 영축산으로 그 이름을 바꿉니다. 1463년(세조 9년) 간경도감에서 간행된 법화경언해(法華經諺解)본을 근거로 하여 鷲자를 취가 아닌 축으로 고쳐 부르도록 합니다.
산 이름이 바뀐 경위야 어쨌든 양산의 영축산은 통도사(通度寺)가 위치한 산 입니다. 통도사가 불보사찰이라는 지위를 갖게 된 것은 부처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金剛戒壇)이 있기 때문입니다. 불사리(佛舍利)와 관련한 내용은 삼국유사에 아래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善德王代貞觀十七年癸卯
慈藏法師 所將佛頭骨 佛牙 佛舍利百粒
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分爲三 一分在皇龍塔 一分在大和塔
一分幷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三國遺事 3卷 塔像 前後所將舍利]
뜨거운 햇살이 구름에 가린 여름날 통도사 절 마당을 지나갑니다. 뭐라 뭐라 얘기하고 있는 스님의 음성이 스피커를 통해 절 마당까지 흘러 나오고, 법당 안에는 불자들로 가득합니다. 절집 마당에는 봉헌이라는 글자와 시주한 사람의 이름자가 새겨진 조형물들이 여럿 보입니다. 신도들은 신발을 벗고 금강계단을 돌고 있고, 계단으로 향하는 출입문 안쪽에는 그러하도록 안내하는 것으로 보이는 분이 서 있습니다.
산신각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담장 너머 금강계단을 바라봅니다. 위에 거론한 삼국유사 내용을 보면 자장율사가 가져온 사리는 삼등분하여 그 중 하나를 부처님이 착용했던 가사 한 벌과 함께 통도사 계단에 봉안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곳이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말이겠지요. 아! 성스러운 이 곳 계단 앞에 엎디어 인간의 무도함, 무지막지함에 대하여 묻는다면 부처님은 무어라고 답을 해주실까요? 아마 지금은 무기(無記)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구룡지(九龍池)에 남아 터를 지키겠노라 맹세한 눈 먼 용은 오룡동(五龍洞)으로, 삼동곡(三洞谷)으로 간 벗들이 부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