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가다

실상사 편운화상탑

samongeereem 2026. 9. 16. 03:06

 삼국사기 견훤조에 따르면, 견훤은 서기 900년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의자왕의 오랜 원한을 풀겠다고 선언한다. 후백제를 세운 것이다. 그러나 후삼국 초기 신라를 군사적으로 압도하며 주도권을 잡았던 견훤의 후백제는, 정권의 기틀이 채 다져지기도 전에 발생한 기득권 호족들과의 마찰과, 아들 신검의 쿠데타로 인한 갈등으로 건국 36년 만에 허망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한편 통일신라 말기 왕실 사람들이나 진골 귀족들과 밀착하여 극도로 세속화되어 버린 교종(教宗) 중심의 불교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으니, 당나라에 유학하여 조사선(祖師禪)을 접하고 돌아온 선종(禪宗) 승려들이 전국 명산에 선종 사찰을 창건한 것이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백제시대부터 미륵신앙의 뿌리가 매우 깊은 호남지역에 자리한 후백제도 기존 왕실 중심의 교종 대신 평등주의적이고 혁신적인 선종 승려들을 적극 후원하고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하여 정권의 정신적 거점인 전주 인근의 금산사 뿐만 아니라 새로 자리한 선종 사찰 또한 지방 민심을 수습하는 이념적 거점으로 삼았던 것이다. 물론 후백제가 서남해안 해로를 장악하고 있어서 오월(吳越)과의 교류가 활발하였는데, 이러한 교류를 통해 받아들인 문화적, 정신적 자극도 한 몫 하였을 것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에 유학하여 마조도일(馬祖道一) 문하에서 선(禪)을 전수받고 돌아온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실상사를 창건한다. 당나라에서 선(禪) 사상을 전수받고 돌아온 승려들이 전국 명산 아홉곳에 세운 선종 사찰 문파를 소위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 하는데, 그 중 최초의 선종 산문이 실상산문(實相山門)이다. 이 실상산문의 본찰이 바로 실상사이다. 이 절은 민초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는 정신적 지주일 뿐만 아니라, 호남에서 영남으로 넘어가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고, 예로부터 철기 생산이 발달했던 지역이라 무기와 농기구 생산의 주요 거점에 자리하고 있어서 정권 입장에서 보면 이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거점으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여건들을 갖추고 있는 곳으로 보인다.

 실상사를 창건한 증각대사 홍척(洪陟)의 제자 중에 편운화상(片雲和尙)이란 이가 있다. 도법스님이 거처하는 목탁 건물 뒤편에 위치한 수철화상탑의 주인인 수철화상(秀實和尙)과 동문수학한 사이다. 따라서 편운화상 역시 실상산문(實相山門) 사람이므로 그의 승탑 또한 실상사 부근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 실상사 입구에 서 있는 승탑순례길 안내판에 보면 그의 승탑은 안내판에서 그리 멀지 않은 5번으로 표시된 위치에 있다.

 자! 이제 후백제가 어쩌고 견훤이 어쩌고 하면서 두서없이 지꺼린 까닭을 알아보자.

 승탑순례길 안내판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200여 미터쯤 걸어 올라가면  편운화상의 승탑을 만날 수 있는데, 탑신 위에 한 쪽이 약간 깨진 옥개석을 이고 있는 이 승탑은 무려 국가공인 보물이다. 승탑 앞에는 이 문화재의 탑신에 새겨져 있는 24개 문자에 대하여 그 위치와 명문의 글자를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 있다. 내용에 따르면 편운화상탑 탑신에 創祖洪陟弟子安峰創祖片雲和尙浮圖 正開十年庚午歲建(창조홍척제자안봉창조 편운화상부도 정개십년경오세건)이라고 24개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실제 탑신을 살펴보면 새겨진 글자의 형태를 거의 알아보기 힘들다. 어쨋든 우리말로 풀어보면 '실상산문을 처음 연 홍척의 제자이자 안봉사를 창건한 편운화상의 부도를 정개10년 경오년에 세우다.' 뭐 그런 뜻이다.

 이 명문에는 후백제와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단서가 있다. 바로 정개 정개(正開)라는 단어이다. 견훤이 완산주 즉,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건국한 해가 서기 900년인데, 그로부터 10년 뒤인 910년이 경오년(庚午年)이다. 정개십년경오(正開十年庚午 )의 경오년이 바로 그것이다. 이로써 명문에 나오는 정개(正開)라는 단어가 후백제의 연호를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이다. 더불어 후백제가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는 것도 확인된 것이다. 후백제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보니 이 승탑의 명문이 유일무이한 증거인 셈이다. 또한 이 승탑 명문으로 인하여 견훤이 실상산문의 승려들과 깊이 교류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편운화상탑이야말로 실상사가 후백제의 국가적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완벽히 증명하는 문화재인 셈이다.

 아마도 스승의 예로 대했을 법한 실상산문의 편운화상에게 견훤은 어떤 가르침을 구했을까? 군왕의 도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했을까? 아니면 개인적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도리에 대하여 물었을까? 그가 '도(道)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화상은 무어라 답했을까? 목탁의 주련에 씌여진 정천각지안횡비직(頂天脚地眼橫鼻直) 문구를 들어 눈은 옆으로, 코는 곧게 나 있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곧 진리라고 일러주었을까? 아니면 마조(馬祖) 스님의 가르침을 빌어 조작하거나 다투지 않는 일상의 순수한 마음이 곧 깨달음의 도(平常心是道)라고 가르침을 주었을까....

 편운화상 천화(遷化) 후 사반세기쯤 지나 후백제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정개(正開)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할만큼 자주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었음에도, 견훤은 아들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막내 아들은 살해당하고, 뿐만아니라 자신은 강제로 금산사에 유폐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어디 그 뿐인가! 유폐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평생의 숙적이던 왕건에게 투항하는 처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건 군대의 최전선에서 자신이 세운 후백제를 직접 멸망시켜야 하는 전장에 나서게 되는 기막힌 운명에 처하게 된다.

 구월을 가로지르는 볕이 너무 좋은 날이다. 중천에 떠 있는 햇살에 벼가 한창 익어갈 무렵, 몸집이 좋은 소나무가 마치 야차들처럼 도열한 길을 지나고, 절마당 가생이 대나무숲을 지나 온 눈 먼 나귀 하나가 마치 자기집처럼 목탁 건물에 들어선다. 순례길 첫번째 승탑에서 만난 견훤을 순례길 내내 짊어지고 다니더니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이 눈 먼 나귀를 목탁 좌우에 자리하고 있는 증각대사와 수철화상은 어찌 보고 있을까? 오늘도 변함없이 목탁의 도법스님 방문은 한 쪽이 열려 있다.

수철화상탑
용담대화상탑
실상사 승탑
자운대화상탑
회명당대선사탑
증각대사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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