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5년 3월 2일 중종의 두번째 부인 장경왕후가 원자(후일의 인종)를 출산한지 6일 만에 세상을 떠난다. 불과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였다. 국상(國喪)이 발생하고 새로 계비를 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자 왕은 구언(求言) 교서를 내린다.
나라에 큰 위기가 닥치거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혹은, 중대한 정사(政事)를 결정해야 할 때 왕이 교서를 내려서 여려 폭넓은 의견을 구하는 것을 구언(求言)이라고 한다. 절대권력자인 국왕이라 할지라도 재앙이나 위기가 발생하면 제도적 언론기구 뿐만 아니라 관료와 지방 유생, 심지어 백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견을 구하였던 것이다.
구언 교서에 따라 올라온 상소를 응지상소(應旨上疏))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왕이 구언(求言) 교서를 내렸을 때, 이에 응하여 올리는 상소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 응지상소에는 불벌(不罰)의 원칙이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따지고 보면 왕의 이름으로 말하라고 해놓고, 말한 내용을 가지고 처벌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직언을 하겠는가! 그래서 응지상소는 내용이 과격하거나 왕의 뜻에 거스르더라도 면책특권이 주어졌던 것이다.
이처럼 응지상소(應旨上疏)는 불벌(不罰)의 원칙에 따라 과격한 직언이나, 왕의 뜻에 거스르는 상소일지라도 처벌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지만 모든 경우에 다 적용된 것은 아니었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다는 말이다. 연산군처럼 언로를 탄압한 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그러하였고, 훈구세력이나 척신 등 기득권 세력을 겨냥한 상소가 올라온 경우에도 이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불행하게도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경우 상소를 올린 이들은 엄벌에 처해지거나, 유배를 가기도 하고 심지어 사형을 당하기도 하였다.
응지상소 불벌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서두에 언급한 장경왕후 사후에 중종의 구언 교서와 관련된 상소이다. 상소와 관련된 이들은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 무안현감 류옥(柳沃) 세 사람이다. 이 세 명의 관리가 각자의 관직 인장을 소나무에 걸어 놓고 죽음을 각오하며 올린 상소가 바로 불벌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응지상소인데 이른바 ‘폐비 신씨 복위 상소’가 바로 그것이다. 역사가 기록하고 있듯 이들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응지상소의 불벌 원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 파직되었고 유배형에 처해졌다.
한 낮의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강천산 등로를 타고 내려와 강천사 앞 삼인대비에 이르렀다.
상소 당시에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세 사람의 상소는 이후 이백이십여년이 지나 영조 15년(1739년)에 폐비 신씨가 단경왕후로 복위되고 왕비의 예로 장례가 치러짐으로써 뒤늦게나마 뜻이 이루어지게 된다. 영조는 삼인대의 주역들을 일컫어 '세상에 이처럼 곧은 말을 하는 이가 없도다'라며 칭송하였으며, 1744년에 유림들은 이들의 절의를 기리기 위해 비를 세웠다. 이 비가 바로 삼인대비이다. 비석은 삼인(三印) 대비(臺碑)라는 이름을 앞 뒤로 이마에 붙이고 있고, 비석을 품고 있는 비각은 절 앞을 흐르는 개울 너머 너른 마당에 자리하고 있다.
삼인대비 비문을 들여다 보면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린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문구가 보인다. 사람의 마음 쓰임이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터, 시공을 떠나 곧은 말을 곧은 말로 받아주는 이들도 있고, 곧은 말을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득권자에게 곧은 말을 하면 어떤 화가 닥칠 것인지 뻔히 알면서도 서슴없이 직언한다는 것은 용기나 기백같은 단어로 표현하기에도 한참 부족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時有災異求言 先生乃應旨封章請復正愼氏位號 仍極論勳臣劫制君父放逐國母之罪言甚痛切 疏入臺諫李荇等請拿鞫禍將不測 賴鄭相國光弼力救止於徒配久而放還(그때 나라에 재해와 변괴가 있어 왕이 신하들에게 의견을 구하였다. 선생들이 이에 응하여 상소를 올려 단경왕후 신씨의 위호를 회복해 달라고 청하였다. 아울러 훈구공신들이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를 내쫓은 죄를 극렬히 논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간절하고 통렬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대간 이행 등이 그들을 잡아 국문할 것을 청하여 어떤 화가 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의정 정광필이 힘껏 구명(救命)해준 데 힘입어 도형에 처해진 뒤 귀양 가는 것에 그쳤는데 오랜 시일 후에 풀려났다.)
훗날 충암 김정(沖庵 金淨 1486~1521)은 기묘사화 때 조광조, 김식 등과 함께 화를 당하게 되는데, 죽음이 눈 앞에 닥친 것을 알면서도 위엄과 품격을 잃지 않고, 평상시와 다름없이 의연하게 행동하였다고 그를 묘사한 이가 있다. 비록 소설이지만 벽초 홍명희는 그의 대하소설 임꺽정에서 기묘사화 관련 대목을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음의 공포에 직면했는데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신진 사림파(士林派)의 기개를 엿볼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죽음을 앞두고도 일없이 웃고 이야기하고 심지어 술도 사다 먹다니!
(금부 안에서는 잡히어 온 사람들이 넓은 뜰에 앉았는데 금부도사의 인정으로 공석 한 닢씩을 주어 깔고 앉았으나, 언 땅에서 올라오는 찬기운과 기왓골에서 내려오는 찬바람에 몸이 벌벌 떨리었다. 잡혀온 사람들은 대사헌 조광조와 형조판서 김정과 대사성 김식과 부제학 김구와 우승지 윤자임과 좌부승지 박세희와 동부승지 박훈과 응교 기준 등 여러 사람인데 모두 무슨 죄로 잡히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죽음을 면치 못할 줄은 다 각기 짐작하였다. 그러나 조광조 외에는 모두 일없는 사람같이 웃고 이야기하고 윤자임이 금부도사에게 사정하여 술을 사다가 돌려 마신 뒤에는 시까지 읊조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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