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가다

화엄매

samongeereem 2026. 3. 21. 11:24

 들매, 흑매 꽃이 피었다.

 겨울이 다 갔는가? 세간의 형편을 깊이 있게 알리 없는 눈 먼 나귀의 소견으로 주위의 큰 추위는 일단 지나간 것 같은데, 멀리 떨어진 곳은 여전히 한겨울인 듯하다. 어느 곳이든 완연한 봄이 오기를 기대하며, 한바탕 모진 추위를 겪지 않는다면 어찌 이토록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을꼬! 라고 읊었던 황벽 희운(黃檗 希運)의 송(頌)을 소환해 본다.

 塵勞迥脫事非常 (진로형탈사비상)

 緊把繩頭做一場 (긴파승두주일장)

 不是一翻寒徹骨 (불시일번한철골)

 爭得梅花撲鼻香 (쟁득매화박비향)

 심란한 세상사 벗어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고삐 단단히 쥐고 한 판 붙어 봐야지.

 한바탕 모진 추위를 겪지 않는다면,

 어찌 이토록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을꼬!

 꽃을 보고 내려오는 길에 공양간 앞을 지나다 보니 범음료(梵音寮) 공양실 입구에 '일일부작 일일불식' 이라고 쓰인 현판이 눈에 띈다. 선종 사찰의 자립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가르침으로 자리 잡은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라는 말은 백장 회해 (百丈 懷海) 선사의 백장청규(百丈淸規)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장청규(百丈淸規)는 백장 선사가 제정한 선종 사찰의 생활 규범이자 공동체 운영 원칙을 이른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의 실천적 가풍 속에서 깨달음을 얻은 인물이 바로 황벽 희운이다. 한편으로 어떤 상황에 처하든 객(客)이 아닌 주인(主人)으로서 깨어 있으면,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진리의 세계라고 가르친 이른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작자 임제 의현(臨濟 義玄)은 황벽의 제자이다.

 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기 전 들매, 흑매 꽃을 떠올리며 황벽의 송(頌)을  다시 한 번 읖어 본다.

 심란한 세상사 벗어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고삐 단단히 쥐고 한 판 붙어 봐야지.

 한바탕 모진 추위를 겪지 않는다면,

 어찌 이토록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을 수 있을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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