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다

오수자굴

samongeereem 2026. 2. 13. 14:10

 백암봉(白岩峰) 북쪽에 계조굴(戒祖窟)이라는 바위굴이 있는데, 어찌나 큰지 굴 속에 큰 집 한 채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다. 바위굴에 계조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보아 계율(戒律)에 정통한 스님이 수행했던 곳으로 보인다. 나의 옛 스승인 향적암의 은경(隱冏)스님은 ‘여기가 구천둔(九千屯) 터로 보인다.’라고 항상 말씀하셨다. 지금 보니 이 굴은 깊고 고요한 곳에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곳이기도 하거니와 만물의 올바른 이치를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그런 곳으로 보인다. 예전에 기록에서 보았던 풍경의 묘사와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경치가 다르지 않으니, 은경스님이 말한 것도 혹 그런 연유에서 아니겠는가!

 

 위 내용은 갈천선생문집(葛川先生文集) 3권의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峯記)에 나오는 계조굴에 관한 부분을 내 나름으로 번역한 것이다. 갈천은 조선 전기 문신 임훈(林薰 1500~1584)의 아호(雅號)이다. 문집에 나오는 원문은 아래와 같다.

所謂戒祖窟者 在白岩之北 石广可容一大宇 必是戒祖者居之而名也 冏師居下香積 常云此必九千屯基也 今觀此洞雖邃 皆人跡所到 無可隱伏處 古說所稱四方之迹不差 冏說亦或然也

(출처 : 한국고전종합DB)

 

 세속의 규율을 무참하게 어긴 자들에 대한 심판이 내려지고 있는 시절이다. 오늘은 규율을 어긴 우두머리 밑에서 높은 벼슬을 지낸 자에 대한 심판이 있는 날이다.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판관의 판결문 읽는 소리가 지루해질 무렵 구천둔 계조굴 앞에 이르렀다.

 굴 안에는 아직 겨울을 붙잡고 있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바닥에는 빙순이 도톰하게 자라고 있다. 하지만 지나온 등로를 돌이켜보면 하얀 소캐 이불을 덮고 있는 계곡 얼음장 아래로 물이 제법 빠르게 흐르고 있고, 갈천선생이 문집에서 언급한 향림(香林)은 무거운 눈꽃을 털어내고 붉은 가지에 푸른 잎파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더불어 능선을 넘는 칼바람도 어느새 온순해져 있지 않았던가!

 만물에 깃들어 있는 올바른 이치가 숨김없이 드러난다고 하는 곳! 먼 옛날 무려 구천명이나 성불했다고 전해지는 곳! 바로 그 계조굴 앞에 눈 먼 나귀 하나가 서 있다. 오수자굴이라고도 불리는 이 바위굴 앞에 걸음을 멈춘 까닭은 굴 안쪽에 생긴 신기한 결빙을 구경하려 함이기도 하거니와, 때마침 세속의 규율을 어긴 고관대작에 대한 판결문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아서 판관의 주문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였기 때문이다.

 불가의 계율과 세속의 규율에는 차이가 있을까? 물론 승속(僧俗)의 율법이 근본적인 목적에서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나 집단의 질서를 유지하고 악행을 방지한다 점에서는 둘 사이에 다름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 옛날 이 곳 계조굴에서 수행하고 있던 율사(律師) 화상이 오늘 세속 판관(判官)의 주문(主文)을 듣는다면 그는 과연 어떤 평가를 내놓을까? 아니,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계율(戒律)에 정통한 스님이 상견(常見)이나 단견(斷見)을 내놓을리 만무할 터이지만, 그래도 이 황당함을 접하게 되면 그 또한 눈 먼 나귀처럼 허탈한 표정으로 망연자실(望然自失) 하지 않을까? 

 물소리, 바람소리, 산새들 지저귀는 소리가 판관의 판결문 읽는 소리에 묻힌 오늘은 2026년 2월 12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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