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행위다. 그런 일을 하는 까닭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이 조선시대라면 역사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유교적 명예의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특권의식의 표현일 수도 있다. 요즘으로 치면 심산유곡 바위 대신 SNS에 남긴 도발적이거나 철학적인 문구라고나 할까? 어쨋든 둘 다 목적은 대중의 어그로를 끌기 위함 아니겠는가!
역사에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것을 사명(使命)으로 알았든 특권(特權)으로 알았든 우리땅 명승지 수많은 바위마다 선조들이 새겨 놓은 흔적들이 참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존재를 기록하는 문자로 바위에 새긴 문구는 고작 자신의 관직과 이름자 뿐이다. 간혹 그가 다녀간 해의 간지나 계절을 새겨놓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문구는 단촐하다.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름자를 새기는 것이야 당연할 터인데, 그 한정된 공간에 왜 관직을 새겨 놓았을까? 태어난 해나 고향 혹은 출신한 과거시험, 자(字)나 아호(雅號), 사는 곳 등 자신을 대표할 수 있는 정보가 여러가지일 터인데...
하긴 수호지에 나오는 송강의 한탄처럼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볼 때, 그 사람됨을 보지 않고 그가 어떤 관직을 가졌는지만 본다(世人看人 不看其為人 只看其官職)고 하니 평생 덕과 공을 쌓은 결과로 얻은 관직이 오죽이나 소중했겠는가!
추래불사추(秋來不似秋)라 절로 읊조리게 되는 9월 중순의 가을 같지 않은 날! 습한 계곡길을 따라 내연산(內延山) 삼용추(三龍湫)를 찾았다. 겸재 정선(謙齋 鄭敾)이 청하현 현감 시절에 그렸다는 내연산 삼용추도(三龍湫圖)에 나오는 그 폭포들이다. 비가 온 뒤라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 내는 이 아름다운 폭포 주위의 바위에도 우리 선조들은 어김없이 자신들의 흔적을 남겨 놓았다.
그 중 관음폭포 앞에 요즘 언어로 표현하자면 어그로 쩌는 바위가 있다. 이 바위가 시선을 끄는 까닭은 바로 내연산 바위에 새겨진 수많은 각자(刻字) 중 유일하게 여인의 이름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바위에는 몇몇 이름자와 함께 이광정(李光正)이라는 이름자가 새겨져 있고 바로 옆에 경기달섬(慶妓達蟾)이라는 여인의 이름자가 새겨져 있다. 이름의 형태로 보아 경상감영의 관기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광정(李光正)은 누구인가? 나중에 이휘정(李輝正)으로 개명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1837년(헌종 3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된 인물이다. 양반 중심의 유교적 신분질서가 엄격한 시절 무려 관찰사의 행차에 동원된 한낱 관기(官妓)의 이름자를 자신의 이름자 옆에 각자(刻字)로 새기게 한 이광정(李光正)! 그는 어찌하여 그들만의 특권을 기생에게 베풀었을까?
필경 두 사람 사이에는 아름다운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동정이든 애정이든 아니면 예술적 교감이든 화담과 진이를 연상케하는 아름다운 인연이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선유대 위 먹구름 사이로 푸른 틈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리던 비도 잦아들었다. 하산길을 아쉬워하는 용추의 폭포수는 여전히 씩씩하고 우렁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