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에 가다

대둔산 태고사 석문

samongeereem 2025. 9. 23. 15:51

 효종이 죽자 효종의 계모이자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조씨(慈懿大妃 趙氏)의 복상 문제가 제기된다. 윤휴(尹鑴) 등 남인은 삼년복(三年服) 즉, 27개월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은 열두달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1차 예송논쟁의 발단이다.

 조선시대 권신이자 위대한 성리학자로 알려진 송시열은 사후에 송자(宋子)라고 존칭받으며 문묘와 종묘에 배향 될 정도로 높게 평가 받았다. 하지만 그의 강직함과 배타성으로 인한 서인의 분열 그리고 성리학의 교조화로 사상적 경직을 초래하였다는 점 등으로 인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그가 위대한 학자로 평가를 받거나 비판적 혹은 부정적 평가를 받는 것과 관계없이 송시열이라는 이 조선시대 셀럽을 언급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예송논쟁이라는 단어이다. 예송논쟁에서 송시열은 윤휴와 극명하게 다른 입장을 취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사람은 조선 예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김집(金集)에게서 예학을 배운 즉,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하긴 동문수학한 사이라고 해서 반드시 견해가 같아야 한다는 법은 없을 터! 다만 두 사람의 견해 차이가 단순히 학문적 해석의 차이만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이 많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가을 장마가 오락가락 하면서 하늘이 잔뜩 찌푸린 날 아침! 대둔산 낙조대(859m) 다녀오는 길에 태고사(太古寺)에 들렀다. 태고사 올라가는 길은 경사가 무척 심하다. 가파른 계단을 꽤 올라야 한다. 계단길을 한참 오르다 보면 문처럼 서 있는 두 개의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그 두 개 바위 사이로 작은 통로가 나 있다. 이 문처럼 서 있는 두 개의 바위 중 왼쪽 바위에 석문(石文)이라 쓰인 커다란 각자(刻字)가 있다. 특이하게도 돌 석자의 모양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바위에 돌멩이가 하나 붙어 있는 형상이다. 이 글자 역시 돌 석자와 같은 글자인데 이 석문이라는 글자는 우암(尤庵) 송시열의 글씨다.

 이 곳 태고사는 젊은 시절 우암이 학문을 닦던 장소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짐작컨데 그는 이곳에서 유학과 성리학의 기초를 다졌을 것이다. 유교적 예(禮)의 원칙을 엄격히 고수하는 예학의 기초 역시 이 곳에서 다져졌을 것이다. 심지어 호랑이 일화까지 전설로 전해지는 것을 보면 그가 이 일대에서 꽤나 기백있는 인물로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낙조대에서 암봉 돗대봉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능선의 바윗돌을 머리에 이고 있는 절집 마당에 서면 확 트인 절마당 앞쪽은 오대산과 생애대로 이어지는 능선이 펼쳐져 있다.

 400년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태고사 허름한 절집에서 밤낮없이 학문에 몰두하던 우암(尤庵)이 잠시 머리를 식히러 방 밖으로 나온다. 크게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켜더니 뒷짐을 지고 절마당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다. 한참을 거닐던 그가 쉴 요량으로 마당가 나무 그루터기에 턱을 괴고 앉아 허공을 바라본다. 시간이 멎은 듯한 그 때 불현듯 시자(侍者)에게 과일과 삶은 달걀 꾸러미를 지운 채 문우(文友)를 찾아 온 윤휴가 가뿐 숨을 몰아 쉬며 석문을 지나 산 길을 올라오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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